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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과학 카르텔’ 논쟁

by 중소기업투데이 2024. 1. 11.

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현대는 공인된 전문가들의 판단이 우월하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선 그렇다. 과학자의 ‘자기통치(self-government)’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들만의 견고한 울타리가 대중에게 통용된다. 디지털 기술만능의 불평등 사회를 예감하는 지금, 그런 기류가 노골화되면서 ‘과학기술’과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리기 힘든 검색어가 되고 있다. ‘플랫폼 제국주의’만 해도 그렇다. 네트워크 참여자들에 대한 애그리게이터의 수탈적 구도, 기술장벽에 가로막힌 다수의 낙오자를 걱정하는 소리도 많다. 결국 문제는 과학기술의 배분적 가치다. 기술 개발과 생성에 대한 대중적 참여, 기술과 민주주의의 부조화 따위의 갑론을박이 그로부터 촉발된다. 첫째로 꼽을 만한 ‘과학 카르텔’의 가치 논쟁이다.

이런 논쟁은 20세기 초반부터 있어왔다. 물리학자 마이클 폴라니는 “오직 전문가들만이 과학의 궤적에 관해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고, ‘대중의 의지’는 그러한 숙의 과정에서 전혀 기여할 수 없다”며, 과학자 그들만의 ‘왕국’에 손을 들어주었다. 모든 기술과 아이디어는 사회로부터 독립된 과학자의 고독한 연구와 실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과학자 존 버널은 생각이 달랐다. “과학은 오로지 사회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사람들의 삶에 혜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면서 공동체적 감시와 참여를 강조했다. 심지어 폴라니 같은 순수과학론자들을 ‘엘리트주의적 철부지’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둘째로 꼽을 만한 ‘과학 카르텔’의 역학(力學) 논쟁이다.

급기야 1990년대 미국 시민사회 일각에선 ‘대중역학’(popular epidemiology)이 등장했다. 과학기술의 엘리트화가 아닌, 대중적 공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미래 기술사회에 또 다른 방법론적 키워드를 암시한 것이다. ‘대중역학’은 특정 애그리게이터의 독점을 견제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지식과 자원을 총괄하고 동원하는’ 프로세서(processor)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 틈에 토마스 쿤은 기득권적 ‘정상과학’을 깨부수는데 일생을 바쳤다. 비웃음을 샀던 ‘비정상’이 기어코 ‘정상’이 되고, 결국 진보된 최첨단 과학으로 승격되곤 했다. ‘대중역학’의 처절한 실천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꼽을 만한, 과학 ‘카르텔’의 해체론적 논쟁이라고 하겠다.

무릇 과학사를 복기하면 늘 이런 ‘카르텔’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 격조있는 언어들이 섞인다면, 그로 인해 한 국가·사회의 R&D예산이 좌우된들 문제될 게 없다. 역대급 삭감을 하든 말든, 그런 사변적 고뇌의 결과라면 이의를 달 여지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품위있는 숙고와 분석도 없이, 최고 권력자가 그저 “과학 카르텔을 제로베이스로 검토하라”고 했다던가. 그런 호령 한 마디에 희대의 삭감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과학’이라는 초가 삼간에 기생하는 빈대라고나 할까. 검토하라던 ‘과학 카르텔’은 극소수 연구 현장의 지엽말단의 낭비적 행태일 뿐이다. 과학사적 카르텔 논쟁과는 그 궤도와 품격부터가 다르다.

여기서 과학적 사변의 충분조건을 하나 덧붙인다면, 시장 창조를 위한 정부의 역할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선뜻 누구도 나서길 꺼려하는 황무지 개척에 정부와 공공부문이 나서는 것이다. 치열한 디지털시대에 나노기술, 생명공학, 청정에너지, 신약 개발과 같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결사대를 정부가 전폭적으로 밀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부는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다. 최소한의 방임적 규제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신고전주의는 이제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다.

新케인지언을 경멸하는 미국조차 그러하다. 일론 머스크, 순다르 피차이, 팀 쿡, 제프 베이조스, 샘 앨트먼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는다.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써가며 ‘이노베이션’을 핑계댄 민간기업들의 욕망을 조절한다. 욕망의 경계를 긋고, 무늬만’이 아닌 진짜 이타적 혁신을 견인하는 것이다. 생성AI 너머 AGI나, 휴머노이드가 눈앞에 온 지금이야말로, R&D로 대표될 공적 부조와 지원은 절실하다. 죽고 사는 문제다. 허나 1960년대 이래 사상 초유의 R&D 예산 삭감에 당장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언제까지일진 모르나, 입으로만 ‘AI 입국’, ‘양자혁명’, ‘레벨4 자율주행’ 상용화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애먼 과학계 일각은 졸지에 연구비나 짬짜미하는 부류로 치부되고 말았다.

출처 : 중소기업투데이 http://www.sbiztoda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