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칼럼니스트
고양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심리학자

버스나 지하철엔 차내에 LED스크린과 디지털사이니지가 있어 자연스레 그 화면을 보게 된다. 승객들은 이를 외면하고 싶어도 그 소리마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보고싶지 않음에도 계속 보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광고가 나오고 연예인들의 화려한 입담들이 차내의 모든 시선을 묶어놓기 일쑤다. 디지털기술과 기기가 지배하는 지금 세상이 만든 작은 풍경이다.
스마트폰 중독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잠깐 본다는게 어언 아침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잠시도 나의 시선에서 스마트폰이 포착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세상을 지배한 디지털기기에 철저히 예속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건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 삶의 소중함,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으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1849년 12월 스물일곱 살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황제에 대한 소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다른 죄수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어느 광장으로 호송되었고 곧 처형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햇살이 성당 돔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모든 생명이 그 햇살처럼 짧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모든 게 더 활기차게 느껴졌다. 그 최후의 순간에 황제의 대리인이 말을 타고 들어오더니 시베리아에서의 노동형으로 감형되었다고 발표했다. 거의 죽음을 겪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 경험은 남은 평생 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고 새로운 공감의 깊이를 알게 했고 성찰능력을 키워주었다.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깊이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흔히 우리는 산만하게 현실을 살아가느라 급급해한다. 그러다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면 온몸이 그 위협에 반응하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머리로 혈액이 심하게 쏠리는 신경계를 느낀다. 그때 훨씬 높은 수준의 집중이 가능해지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소하고 감춰진 것들까지 보게 된다. 사람들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덧없게 보이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며, 감정적 울림이 더욱 커진다.
죽음 앞에서 그러하듯이, 현실을 소중하게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충실한 삶의 태도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보듯이 사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새롭게 보일 것이다. 무심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주위 사람들, 매일 보고 듣는 풍경과 소리까지도….
그러나 그런 절박한 자각으로부터 단절되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의 관계가 느슨해진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의 나와 현실을 망각하며,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상실되는 것이다. 특히나 스마트폰과 온갖 디지털기기는 한 시도 우리의 시선을 가만 놓아두질 않는다. 현존재로서 나와 나만의 공간을 성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서점에는 온갖 인문학 서적이 삶을 천천히 관조해야 한다고 외친다. 빨리 가지말고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차고 넘치는 소셜미디어와 스릴 만점의 VR과 AR세상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현실의 살아있음을 관조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불안하고 지루하다. 끊임없이 디지털 문명이 선사하는 쾌락에 몰두하며, 새로운 어떤 것들만을 찾다가 지치는 일을 반복한다.
인생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병에 걸리고 몸이 아프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런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삶 자체를 긍정하고 삶의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도 포함된다. “죽음을 혐오하는 정도는 헛되게 살았다는 인식에 비례한다”는 윌리엄 해즐릿의 말과도 같다.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 말이다. 효용 극대화만을 숭배하는 디지털시대일수록 더욱 그래야 할 것 같다.